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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무지성' 과식 메커니즘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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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P-1 모방 비만 치료제 위고비. 연합뉴스 제공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스'가 올해의 연구 성과로 GLP-1 모방 비만 치료제를 선정한 것은 뜻밖이었다. 제품명 위고비로 유명한 이 의약품의 효과가 워낙 대단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래도 과학 학술지인데 후보에 오른 업적 9개 가운데 하나로 넣는 정도가 무난해 보인다. 2000년대 들어 지구촌 비만이 가파르게 늘고 있고 특히 '사이언스'를 발행하는 미국은 심각한 수준이라 가산점을 얻어 선정된 게 아닐까.



● 맛있는 정제 음식이 주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 풍요로워진 미국은 비만이 보건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 원인을 밝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바로 지방 섭취를 줄이는 것이다. 지방은 칼로리 밀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체지방의 성분이므로 대중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지방을 낮추고 탄수화물을 높인 권장식단이 나왔지만 그 뒤 비만이 오히려 더 가파르게 늘었다.



결국 당과 정제 탄수화물(위와 장에서 당으로 쉽게 분해되는)이 진범이라는 가설이 우세해졌고 소위 '구석기 식단'이라는 진화론적 설명이 곁들여지면서 저탄고지 다이어트 붐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만화 추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 뒤 지방과 탄수화물이 알고 보니 공범이라는 가설이 나왔다. 식품산업이 발달하면서 식단에서 정제된 지방과 탄수화물이 적절히 배합된 상태인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들 음식은 맛도 좋은데 각종 첨가물을 적절히 배합해 음식의 풍미를 더한 업체의 노하우 덕분이다. 

음식을 먹을 때 구강에서 보내는 정보와 소화기에서 보내는 정보를 바탕으로 식사량이 결정된다. 이전에는 구강은 맛을 통해 더 먹으라는 양의 피드백을, 소화기는 음식이 채워짐에 따라 그만 먹으라는 음의 피드백을 제공해 식사를 멈추는 시점이 정해진다고 봤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화기에서도 영양을 분석해 양의 피드백을 하고(low road) 그 기여도는 구강의 정보(high road)보다 큰 것으로 밝혀졌다. 네이처 제공

식사량은 구강의 감각 기관이 음식의 맛에 대해 보내는 '먹으라는 신호'와 음식이 들어와 배가 찼을 때 위와 장에서 보내는 '그만 먹으라는 신호' 사이의 힘겨루기의 결과다.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그만 먹으라는 신호가 점점 커져 먹으라는 신호를 넘어서면 식사를 멈추게 된다. 그런데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는 맛이 좋아 먹으라는 신호가 센데다 영양 밀도도 높아 그만 먹으라는 신호가 우세해졌을 때는 이미 칼로리 균형이 무너진 상태라는 이론으로 꽤 그럴 듯 하다.



그런데 몇몇 동물실험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위의 가설과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맛이 있다고 해서 더 많이 먹는 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현상은 우리도 늘 경험하는 것으로 과일을 좋아한다고 과일만 배불리 먹는 일은 거의 없고 생크림을 아무리 좋아해도 생크림만으로 배를 채우려다가는 곧 물린다.



게다가 음식이 들어갔을 때 위와 장에서 보내는 신호가 음성 피드백, 그만 먹으라는 신호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예를 들어 포도향과 오렌지향이 있는 물에 대한 선호도가 비슷한 생쥐에게 포도향 물을 줄 때는 주사기로 위에 설탕물을 넣어주고 오렌지향 물을 줄 때는 위에 맹물을 넣어주는 조작을 수일 동안 실시한 뒤 선택하게 하면 포도향 물을 선호한다. 



소화기 역시 들어온 음식물의 영양 정보를 감지해 뇌에 더 먹으라는 신호, 양성 피드백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소화기에 분포한 미주신경을 통해 뇌의 선조체로 신호가 가면 도파민 분비가 늘어 섭식 행동이 강화된다. 맛을 감지한 구강의 의식적 신호와 영양(칼로리)을 감지한 소화기의 무의식적 신호가 합쳐져 어떤 음식을 먹으라는 신호의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후속 연구 결과 놀랍게도 구강의 의식적 신호보다 소화기의 무의식적 신호의 힘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비만의 만연 역시 음식의 맛보다는 영양 때문이라면 소화기가 더 먹으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게 만드는 영양의 비밀은 무엇일까.



● 부실한 장의 영양 정보 시스템



지난 2월 학술지 '셀 대사'에는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 논문이 실렸다. 소화기에서 뇌로 가는 영양 신호가 영양소, 당(탄수화물)과 지방에 따라 분리돼 있어 두 경로가 동시에 활성화될 때 신호가 증폭돼 뇌에서 도파민을 많이 만들게 되고 그 결과 더 먹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동물실험 결과도 탄수화물만으로 이뤄진 먹이나 지방만으로 이뤄진 먹이보다 탄수화물과 지방이 섞인 먹이를 더 많이 먹는다. 

 

오늘날 과식으로 인한 비만의 원인은 장에서 보내는 영양 신호 시스템의 결함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 소화기는 들어온 당과 지방 신호를 별개의 경로로 뇌에 보내기 때문에 두 영양소가 많이 들어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신호가 증폭돼 뇌에서 도파민 분비가 크게 늘어 더 먹게 된다. 셀 대사 제공

공교롭게도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 대부분이 탄수화물과 지방 모두 꽤 들어 있는 조성이다. 밀크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의 영양성분을 보면 각각이 전체 칼로리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해 두 경로 모두를 최대한 자극하는 조성이다. 햄버거의 경우 보통 세트 메뉴로 많이 먹는데 콜라(당분)와 프렌치프라이(지방과 탄수화물)가 시너지 효과를 낸다. 그렇다면 왜 소화기는 섭취한 당과 지방의 칼로리 정보를 통합해 뇌로 전달하는 별로 복잡해 보이지도 않는 시스템을 진화시키지 못해 이런 오류를 낳는 걸까.



인류의 게놈 대부분은 여전히 수렵채집인의 삶에 적합하게 진화한 상태로 남아있다. 1만 년 농업을 시작한 뒤 녹말분해효소 유전자 복제 수 증가나 유당분해효소 발현 유지 변이 등 일부 적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하물며 100년 남짓한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 역사에는 전혀 대응하지 못한 상태다.



수렵채집인의 식단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에는 당(탄수화물)과 지방 모두를 풍부하게 함유한 음식물이 거의 없다. 고기에는 지방이 많지만 당(탄수화물)은 거의 없고 열매와 덩이줄기(또는 뿌리), 꿀에는 당(탄수화물)이 많이 들어있지만 지방은 거의 없다. 물론 요리를 통해 어느 정도 같이 먹을 때도 있지만 오늘날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처럼 하나의 음식으로 얽혀 있는 상태는 아니다. 



몸에 밴 습관을 좀처럼 고칠 수 없는 이유는 습관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식습관이라는 말도 과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인 셈이다.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음식의 영양 정보를 뇌에 알려주는 장의 무의식적 신호 체계의 부실함이 오늘날 과식으로 인한 비만 만연의 배후라는 사실을 알게 됐더라도 이를 개선하는 데 별 도움은 안 될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의식이 무의식을 이기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문득 GLP-1 모방 비만 치료제가 지난해 '사이언스'의 연구 성과로 선정될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력에 기댄 다이어트는 십중팔구 실패하는 현실에서 무의식의 신호 회로를 건드려 식욕을 낮춤으로써 덜 먹게 해 살을 빼는 해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욕망은 누르는 게 아니라 가라앉혀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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